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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2. 18일 부여 (낙화암, 고란사)

소담1 2021. 12. 24. 13:38

여행장소 : 부여 사비성(낙화암,고란사)

여행일자 : 2021년 12월 18일 토요일

여행인원 : 인천 솔길산악회원 26명과 함께

여행경로 : 사비성주차장-백화정-낙화암-고란사-주차장

여행시간 : 12 : 30 ~ 13 : 30 (1시간)

 

낙화암[]

낙화암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성왕로 247-9[낙화암]에 있으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1984.05.17 지정)이다.

부소산 북쪽 백마강을 내려다보듯 우뚝 서 있는 바위 절벽이 낙화암이다. 낙화암은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게 유린될 때, 수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이 전설로 낙화암이라는 꽃답고 애절한 이름을 얻었지만, [삼국유사]에는 타사암(墮死岩-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 성왕이 국가 중흥의 원대한 꿈을 펼치려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으나, 위덕왕ㆍ무왕ㆍ의자왕에 이르는 동안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이에 신라는 단독으로 백제에 대항하기가 어려워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대결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백제는 국운을 다했던지 의자왕도 정사를 소홀히 하고, 나라가 흔들리게 되었다. 결국 의자왕 20년(660) 사비성은 신라ㆍ당나라 연합군에게 함락되고, 성내에 살던 궁녀와 도성에 남은 여인들은 부소산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침략군이 부소산성까지 몰려들자, 백제 여인들은 적군에게 잡혀가 치욕스러운 삶을 사느니보다 차라리 푸른 강물에 몸을 던져 무너지는 국운과 함께 목숨을 깨끗이 버리는 길을 택했다. 이처럼 여자의 정조를 생명보다 더 소중히 하고, 백제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했던 백제 여인들의 충절과 넋이 어린 곳이 바로 낙화암이다. 바위 절벽에 새겨진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씨는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글씨이다.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죽은 장소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훗날 그 모습을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절벽에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낙화암(落花岩)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낙화암의 기암절벽은 백마강에서 배를 타고 돌아갈 때 더 잘 보인다.

 

고란사(皐蘭寺)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扶蘇山)에 있는 고려시대 백제의 후예들이 중창한 사찰. 문화재자료.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皐蘭寺)라 하였다.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1028년(현종 19)에 중창하였고, 1629년(인조 7)과 1797년(정조 21) 각각 중수하였으며, 1900년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 중건하였다.현존하는 당우로는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 보수, 단장한 정면 7칸, 측면 5칸의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뿐이다. 절의 뒤뜰 커다란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촘촘히 돋아나 있고, 왕이 마셨다는 고란수의 고란샘터가 있고, 주위에는 낙화암·조룡대(釣龍臺)·사비성(泗沘城) 등이 있다. 절 일원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논산 탑정호 출렁다리 트레킹이 예정보다 일찍 끝이났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산행후 식당도 못가고 바로 인천으로 출발하기에는 이른시간이라 논산에서 인천으로 가는길에 잠시 부여 낙화암을 둘러 간다고 한다. 참 오래전 기억도 안날때 다녀갔던 곳으로 한번 다녀오고 싶었던 곳이라 기대를 하고 부소산 주차장에 도착을 한다. 넓은 주차장은 주차비도 없고 깨끗하다. 버스에서 내려 종합관광안내소 건물옆으로 부소산성(낙화암)가는길 입간판이 붙어있는 계단을 따라올라 부소산성입구를 알리는 돌 표지석을 지나 부소산문앞에 도착을 한다. 매표소에서 2000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잘 만들어진 길을 따라 30분정도 가면 백화정 정자앞에 도착하고 바로아래 낙화암 전망대에 올라선다. 전망대 위에서는 삼천궁녀가 뛰여내렸다는 낙화암을 볼수가 없고 유람선을 타고 올려다봐야 바위전경을 볼수가 있을것 같다. 낙화암에서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을 바라보고 뒤돌아 나와 고란사를 가기위해 아랫쪽 유람선 선착장으로 한참을 내려가 고란사를 돌아보고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1시간 남직 시간이 걸렸다. 짧은 시간에 부소산성은 못돌아보고 낙화암과 고란사만 보고 왔다.

 

주차장에서 부소산성(낙화암)가는길을 알려주는 이정표를 따라 올라간다.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부소산성에 둘러쌓인 사비성이 있던 곳이며 고란사와 낙화암은 부소산 안에 있다.

부소산(낙화암,고란사) 입구

낙화암 가는길.

고란사 가는길.

백화정

 

낙화암 윗쪽으로는 높이 46m 절벽 위에는 정자가 있다. 백화정이라는 정자인데 백마강을 시원하게 내다볼 수 있는 정자로 낙화암  정상 바위 위에 육각 지붕으로 세워져 있다. 

백마강의 전경.

낙화암 전망대에서.

고란사 앞을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은 금강의 부여 구간을 지난다.

부소산 북쪽 백마강가에 우뚝 서 있는 바위 절벽이낙화암(落花巖)으로 백제의 의자왕과 관련된 바위다. 바위 위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의하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는 강물에 임하는데, 모든 후궁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고, 서로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백제가 성왕. 위덕왕ㆍ무왕ㆍ의자왕에 이르는 동안 최강의 국력이었으나 의자왕 말년에 국정을 소흘하여 결국 의자왕 20년(660) 사비성은 신라ㆍ당나라 연합군에게 함락되고, 성내에 살던 궁녀와 도성에 남은 여인들은 부소산성으로 피신하고 결국 적군에게 치욕을 당하느니 강물에 몸을 던져 희생한 것이다.

 

이 멋진 곳에서 백제의 멸망에 한을 품은 삼천 궁녀들이 스스로 목숨을 던졌다 하니 슬프고 믿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삼천 궁녀가 적장을 껴안고 낙화했을까? 삼천 궁녀는 정말 낙화암에서 떨어졌는지 전설에 의함이라고 한다. 삼천궁녀가 떨어졌다는 낙화암에 올라보면 300명도 서있기 어려운 작은바위인데 역사는 이긴자의 기록이기에 의자왕의 방탕을 부풀리기 위해 3000명의 왜곡된 숫자라는 생각이 든다.

황토돛배(많이 개조된배)에선 백마강 가요가 흥겹게 들리고 사람들은 흐르는 물줄기와 강바람을 맞으며 흥겨워하는 모습이다.

황포돛배에서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백마강 주변 풍광을 감상하는 것도 좋을것 같지만 우리는 시간이 없어 눈으로만 즐기고 간다.

백화정에서 200m정도 계단길을 따라내려가면 좌측으로 고란사가 보이고 우측아래로는 유람선 선착장이 보인다.

고란사 전경

고란사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해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이라는 설만이 전해지고 있다.백제 멸망과 함께 소실된 걸 고려시대에 충창하였고 백제 후예들이 낙화암에서 떨어지며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궁녀들의 넋을 이루기 위해 지금의 고란사 건물근처 은산의 승각사를 옮겨 놓은 것으로 정조 21년인 1797년의 개건하고 절 이름을 고란사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고란사 

삼성각.

수륙양용 처럼 생긴 버스유람선도 백마강을 거슬러 지나간다.

삼천궁녀의 넋을 기리는 사찰, 고란사 
낙화암 아래 백마강가 절벽에 자리하고 있는 고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절 뒤 바위 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으며,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皐蘭草)가 나 있다.  백제의 임금님이 약수를 즐겨 마셔, 원기가 왕성하고 위장병은 물론 감기도 안 걸리고 사셨다 한다. 또한, 고란약수를 한 잔 마시면 3년씩 젊어진다는 전설도 있다. 이 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또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고도 전한다.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落花岩)에서 사라져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028년(고려현종 19)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부소산문으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