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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8. 22일 동화마을, 자유공원

소담1 2021. 8. 26. 12:29

송월동 동화마을

송월동 동화마을은 인천광역시 중구 송월동에 있는 동화를 주제로 한 마을이다. 원래 인천의 오래된 달동네였던 곳을 재정비하여 한국 전래동화를 비롯해 세계명작동화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배경으로 소재로 꾸며졌다.낡고 오래되어보이는 달동네 지역을 중심으로 동화풍의 벽화와 조형물 등으로 꾸며진 동화마을이며 근처에 차이나타운과 접해있다. 이 곳에는 인구감소로 인해서 젊은이들이 대부분 도시로 떠나고 연로해진 원주민들만이 남아있고 공가(空家)가 많은 곳으로 알려져 그리 특색이 없었던 곳이었다.이에 인천시가 송월동 달동네를 관광명소로 재탄생하기 위한 일원으로 주거환경을 대폭 개선하여 아이들에게 친숙한 동화풍의 거리를 만들게 되었고 주택가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과 배경으로 꾸며진 동화마을로 부흥하게 되었다.주택가 골목마다 동화 속에 나오는 배경과 주인공들이 그려져있으며 한국 전래동화를 비롯하여 세계명작동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그려진 벽화와 조형물을 만날 수 있으며 아이들에게는 동화를 통한 동심을 심어주고 어른들에게는 어린시절 동화를 보았던 추억을 만끽하게 해주고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

인천 차이나타운은 인천역 앞에 있는 차이나타운이다. 중국 음식점이나 기념품 등을 파는 상점이 많은 편이다. 화교중산학교가 있다. 매년 9월과 10월엔 각각 인천-중국의날 문화축제와 짜장면 축제가 열린다. 1883년 인천항 개항 후 1884년에 만들어진 중국(청나라) 조계지에 화교들이 모여들면서 형성되었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특이하게 산둥 출신이 중심을 이룬다.조선  청나라 사람들이 대거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임오군란 때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나 조선의 정세가 급변하자 청은 조선의 공식 요청이 없었는데도 산둥성에 주둔 중이던 오장경(吳長慶)의 수군을 파병하였다. 오장경이 지휘하는 4,500여 명의 군사와 함께 40여 명의 상인이 따라 들어왔으며, 이들은 청군이 주둔하던 용산 근처에서 장사를 시작하였다. 이전부터 사신 왕래나 공무역인 개시(開市)를 통해 중국인이 조선에 머무는 일이 잦았으나, 장기 체류를 한 것은 이 일이 시초이다.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제물포는 개항 후보지로 선정되었지만 실제 개항지로 선정되는 데에는 6년이 걸렸다. 조선도 서울의 바로 옆에 개항장이 들어서는 것을 꺼렸고, 일본도 다른 후보지들을 물색하느라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3] 1882년 제물포가 개항지로 선정되었고, 청과 일본, 서구 열강들이 앞다투어 제물포로 몰려들었다. 1883년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이 체결되어 제물포에 조계지가 형성되게 되었다. 일본은 제물포 조약 직후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 영사관을 세웠고, 청나라 역시 청국이사부(靑國理事府)를 세웠다. 1885년 청나라는 본국과 연결되는 전신선을 세웠다.[4] 청나라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채결하고 제물포를 통한 무역을 시작하였다. 1884년 3월 7일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되어 청조차지가 결정되었고, 이후 이곳에 많은 중국인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지금의 차이나타운은 당시의 조차지에서 유래한 것이다.[5] 한국의 화교 규모는 1910년 11,800 여 명이었고 이 가운데 2,800 여 명이 조계 내에 살고 있었다. 오늘날 인천에 사는 화교는 약 2,000 여명으로 차이나타운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는 약 120 가구 500명이다.1883년 개항이 된 이래, 인천 차이나타운 내에는 중국의 종교시설이 만들어졌다. 황합경(黃合卿)이라는 스님이 창건하여 1884년 청나라 상인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의선당이라는 묘우(廟宇: 신위를 모셔놓은 곳, 일명 사당)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화교들의 흥망성쇠를 같이 하던 이 곳은 1970년 거의 존폐의 기로에 놓였다가 2005년 화교들의 모금과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대대적인 수리를 거친후 다시 문을 열었고, 현재 이곳은 인천광역시 화교협회 지정 문화유산 제 1호이다.조계지가 형성된 후 청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청나라 정부의 호호 아래 상하이와 인천을 오가는 해운 사업이 지속되었다.1883년 취항한 남승호는 월 1~2회 나카사키와 부산을 경유하여 상하이와 인천을 오갔다. 1888년부터는 상하이에서 산둥성을 거쳐 인천으로 연 20회 운항하였다.[8] 이를 통한 무역도 활발하여 청일전쟁 당시인 1984년 조선의 무역 가운데 중국 무역은 절반에 해당하는 13,446,363 원 이었다.청조계지의 화상(華商)은 처음에는 광동, 홍콩 지역 출신의 남방상인이 많았으나 점차 산둥 출신의 북방상인이 늘었다. 또한 화교 노동자 역시 개항장 인천의 건축 붐에 따라 입국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산둥성 출신이었다. 이들을 따라 이들에게 음식을 파는 요리업자가 들어왔고 들어왔고, 요리업자에게 채소를 공급하기 위해 농부들이 들어왔다. 1905년 무렵 산둥성의 가정 요리에 바탕을 둔 짜장면이 만들어져 팔리기 시작하였다.

 

인천자유공원

인천 자유공원(仁川自由公園)은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중구에 있는 공원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며, 인천역과 차이나타운이 가까이 있다. 응봉산 전역을 아우르며 정상에는 한미수교백주년기념탑과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다. 인천을 대표하는 공원 중 하나이다.

1889년무렵, 우크라이나인 토목기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한 인천 소재 외국인 거류지의 거주자들을 위한 공원으로서 만국공원(萬國公園)이라는 이름을 달고 개설되었다. 한국 최초의 대형 공공 시설로서 개설 당시부터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일제시대에 서공원(西公園), 만국공원(萬國公園)으로 불렸다. 1957년 김정렬 인천시장이 취임하면서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1957년에 인천 상륙 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UN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의 동상을 공원 동편에 건립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령으로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시위를 한 우리민족련방제통일추진회의의 의장이 구속된 일이 있었다.[1] 맥아더 동상 인근의 광장은 인천 시가지, 인천항과 서해 바다를 조망할 수 있고, 일몰 석양을 잘 볼 수 있는 명소로 알려져 있다.인천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자유공원은 민족상잔의 뼈아픈 기억을 되살리며, 인천시민의 안식처로 각광을 받고 있다. 공원 정상의 맥아더 동상과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을 비롯해 자연보호헌장탑, 충혼탑, 자유의 여신상, 연오정, 석정루 등이 세워져 있으며, 학익동 언덕에 묻혀 있던 선사시대의 유물인 지석묘를 옮겨놓았다. 그밖에 1,0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인천시립박물관과 측후소 등의 문화기관이 들어서 있다. 각종 시민을 위한 행사도 열리고 있다.

 

인천시장공관(인천시민愛집)

1966년부터 2004년? 까지 인천시장 공관으로 사용하다 2021년 07월01일 인천직할시1981년 07월01일 승격 40주년 기념일에 맞춰 인천시민의 품으로 돌아와 인천 시민애집 이름으로인천시 책(Book) 까페 문화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원래는 일제강점기시 어느 일본인 사업가 고노 다케노스케의 별장터였다고 한다. 그는 평양에서 무역상으로 하다가 동학혁명때 겁이 났던지, 일본인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던 인천으로 와서 다시 상점을 열었다고 한다. 이후 미두취인소, 조일양조, 조선신탁, 조선연초 등의 회사에 임원으로 계속 일했다고 한다. 이 집 바로 아래에 인천부청사가 있었으니 그는 보통 재력가가 아니었을거라 생각된다. 인천부윤관사는 오히려 인천부청사에서 꽤 떨어진 신흥동에 있는데, 인천부청사 머리위에 올라탄 격인 이 곳에 거주할 정도면 일보인들 사이에서의 영향력이 대단했을 것이다. 터도 넓고 전망도 좋은 곳이다보니 광복후에는 동양장이라는 서구식 레스토랑이, 이후에는 송학장이라는 사교클럽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1966년 인천시가 매입해서 지금의 한옥집으로 개축, 시장공관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후 2001년 역사자료관으로 재탄생할때까지 17명의 인천시장이 이 공관을 거쳐간다. (그렇다면 평균2년의 재임기간...단명할 터인가...)예전에는 전망이 좋았을텐데 지금은 나무들이 너무 웃자라서 시야를 가려버리는 문제가 있다. 역시 집주인이 살지 않으면 정원이 먼저 망가진다. 정문이 남문이자 아래쪽에 있고, 뒷문이 북문이자 위쪽에 있는데 아래쪽 대문으로 가려면 3~4층 높이에 해당되는 돌계단길을 한참 내려가야 한다. 운치있는 길이긴 하지만, 옛날 인천시청 직원이 공관에 있는 시장에게 급히 보고해야할 일이 생겨 서류를 들고 이 돌계단을 숨차게 뛰어올라가며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을 것 같다. 그 공무원들이 시장공관 이전을 주장하지 않았을까?

 

신포국제시장

19세기 말 신포동에 있던 푸성귀전이 신포시장의 전신이다.푸성귀전 안에는 20여개의 채소가게가 있었는데,그곳의 주인은 모두 중국인 화농(華農)들이었고, 고객은 주로 일본인들 이었다.화농들은 배추, 무, 양파, 토마토, 피망, 당근, 우엉, 마, 연근 등을 거래했고, 산둥성
연대에서 채소씨앗을 가져와 현재 남구 도화동과 숭의동 일대에서 농사를 지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인천은 몰론 우리나라에서 화농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예전 푸성귀시장의 모습은 시장 내 쉼터에 조성된 조형물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어시장과 닭전으로 불리던 한 때를 느낄 수 있는 선어 판매업소나 횟집, 닭집 등은 아직도 적지않다. 신포국제시장은 쫄면의 시초이자 고향이며,닭강정, 오색 만두, 순대, 공갈빵으로 유명하다. 인천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이자 개항의 역사와 함께한 100여년이 넘는 인천의 대표 시장이다.

 

인천역앞 차이나타운 입구문인 폐루

코로나19로 한산한 차이나타운.

송월동 동화마을입구 아치문.

동화마을 벽화.

동화마을 표지판앞.

인천자유공원(만국공원)

맥아더장군 동상앞.

인천시민 헌장비.

인천시장관사입구.

제물포구락부.

옛 인천시장관사 지금은 인천시민애집.

관사내부.

시청사에 붙어있던 옛 인천시 마크 동판.

인천직할시 승격 아치.

옛 인천시청 현판이 보관되있다.

인천시장관사 정문.

일제 적산가옥.

옛 인천시청사(현 인천 중구청사)

신포국제시장입구.

닭강정집의 긴줄.

동인천 지하도상가.

용동 큰우물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