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

2017. 01. 05~08일 중국 북경 여행 (천안문, 자금성, 경산공원)

소담1 2017. 1. 15. 19:50

 

여행일자 : 2017년 1월7일

북경여행 이틀째 학교다닐때 세계사책에서만 배우고 사진으로만 본 천안문과 자금성 그리고 자금성을 내려다볼수있는 경산공원을

여행하고 왔다.중국 북경여행을 가게되면 꼭 가봐야하는 곳이 있는데요 바로 자금성입니다. 자금성은 중국의 역사를 상징하는

곳이자 우리나라의 경복궁과 같은 곳입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있기 때문에 이미 많은 관광객이 찾는 중국 북경의 대표

관광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안문 광장으로 가기위해서는 지하도를 건너야 했는데 가방 검사와 몸수색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리하게 검사를 하고 있길래 눈살이 찌푸려지기는 했지만 이곳의 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랐습니다. 짐검사와 몸수색을 마치

고 본격적으로 천안문 광장에 들어섰습니다. 천안문 광장에는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워낙 넓은 광장이라 그런지

많게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천안문 광장은 중국의 큰 행사가 있을때 행사를 진행하는 곳이라고 하는데 100만명을 수용 할 수 있다고

하니 규모를 짐작 할 수 있었습니다.

 

천안문(天安門)

천안문은 중국인민공화국 수도인 북경중심이 위치하고 있고 맞은 편이 장안거리(长安街)이다. 천안문은 원래 명나라,청나라 황궁의 정문이고

영락18년 (서기 1420년)에 완공하였고 당시 이름을 "승천문(承天门)"라고 했다. 

1946년 화재로 인해 훼손된것을 1465년에 재건하면서 정면 폭이 9칸인 문루식 패루로 만들었다. 그런데 명나라말기 전생의 의해 소실되었으므로 1651년에 다시 복구되었다. 
천안문 총 높이는 33.7미터,수미좌(须弥座)은  한백옥(汉白玉石)로 만들었고 자리에는 10미터 높은 붉은 둔대(墩台)가 있고 둔대우에 있는
성루(城楼)가 있다. 성루는 겹처마 헐산식 건축물로 정면 폭은 9칸 안길이는 5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5"와"9"는 황권(皇权)을 상징한다. 1949년 10월1일 시행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식에서 모택동은 이 문위에서 건국선언을 하셨다. 그후 이문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징으로 되였다.

구룡벽(九龙壁)
구룡벽(九龙壁)는 자금성(紫禁城) 동쪽에 있는 녕수궁( 宁寿宫区)출이문인  황극문(皇极门)을 마주보고 있다. 총 길이는 29.4미터, 높이는
3.5미터 ,폭은 0.45미터 이므로 오색찬란한 유리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구룡벽은 건륭(乾隆)37년(1772년)에 만들어졌다. 정면은 모두 270개의유리조각을 이어 만들어졌으며 9마리의 용으로 장식되어있다. 배경은 산과 돌,구름, 바다로 꾸며져 있다. 구룡벽의 설계와 장식은 양수(阳数)에서 제일 큰수인 9와 중간에 있는 5를 사용하여 황제의 권력과 천자(天子)의 존엄성을 상징하고 있다. 화려한 색감의 유리로 살아 살아 움직이는 듯한 요을 장식해 놓은 걸작이라고 할수 있다.

 

자금성(紫禁城, The Imperial Palace 또는 the Forbidden City)
현대 중국인들은 자금성을 고궁(故宮), 즉 오래된 궁궐이라 부른다. 자금성은 고궁의 옛 이름이다. 자금성은 15세기 초(1420년) 明나라의 3대 황제인 영락제가 남경(南京)으로부터 북경으로 천도할 때에 원대(元代)의 고궁유적을 기초로 세우기 시작하여 영락(永樂) 18년에 완성한 것이다.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의 황궁으로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물이다. 자금성은 국가적 업무를 위한 전조(前朝)와 생활을 위한 내정(內廷)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4면은 높고 붉은 벽으로 감싸고 있다. 자금성 3면(동·서·북)은 성 아래로 해자를 만들어 두었고, 4모퉁이에는 누각(角樓)을 세워 두었다. 동서남북에 각각 문이 있으며, 남쪽 방향에 있는 오문(午門)이 자금성의 정문이다.

 

1. 태화전(太和殿)
영화 <마지막 황제>로 더욱 유명한 장소가 된 태화전(太和殿)은 현재 중국 내 최대 목조건축물이다. 자금성의 중심을 구성하는 건물로, 명나라 영락 18년(1420)에 만들어졌다. 명나라 가정(嘉靖) 11년(1562)에 이름을 황극전(皇极殿)으로 바꾸었다가, 청나라 순치(顺治) 2년(1645)에 태화전으로 불렀다. 현재 건축물은 청나라 강희(康熙) 34년(1695)에 새로 지어진 것이다.

 

2. 건청궁(, Palace of Heavenly Purity)
자금성의 후 삼궁(건청궁, 교태전, 건녕궁)은 황제와 그의 가족을 위한 공간이다. 그 중 건청궁(乾清宫)은 황궁의 일상업무를 처리하는 곳이다.

건(乾)은 “하늘”이란 의미이며, 청(淸)은 맑고 분명하다는 뜻이다. 즉 맑고 깨끗한 하늘로 국가의 안정을 상징하는 장소이다. 건청궁은 황제들이

사망하면, 시체를 넣은 관을 두는 장소이기도 했다. 며칠동안 장례절차를 밟고 난 후 건청궁에 둔 시신을 다시 경산(景山)에 있는 관덕전(觀德殿)

에 두었다가 순장하였다고 한다.

 

 

 

 

 

3. 자금성의 수수께끼
1) 여성들의 감옥 냉궁(冷宮)자금성의 건청궁, 교태전, 건녕궁을 삼궁(三宮)이라고 부르며, 이외에 동쪽의 6개의 궁과 서쪽의 6개의 궁을 육원(六院)이라 부른다. 봉건시대의 황제는 절대권력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마음대로 후궁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한동안 황제의 총애를 받다가 버림받은 여인들이 갇힌 곳을 냉궁(冷宮)이라 부른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문헌을 살펴보면, 여러 곳이 냉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2)자금성에는 용이 몇 마리나 있을까?
자금성은 용의 천국이다. 고대 중국의 황제는 땅을 다스리는 “진용천자(眞龍天子)”라고 불렸다. 그래서 자금성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 장식이대전과 교량 등에 엄청나게 많이 남아 있다. 도대체 자금성에 있는 용은 모두 몇 마리나 될까? 어떤 사람은 자금성의 건물이 모두 8천개이고, 한 건물에 6개의 용무늬가 있다면 4만개쯤 될 것이라 추정하기도 했다. 자금성의 상징적 건물이 태화전(太和殿)의 내외부에 있는 용무늬만도 13844개라는 통개도 있다. 
3)자금성 앞 쪽 건물들에는 왜 나무가 없을까?
자금성의 정면에 자리 잡고 있는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에는 나무가 없다. 이 세 곳은 황제가 국가의식을 거행하는 장소로, 자금성 외궁의 중심이며, 북경의 중심이기도 하다. 따라서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궁내부와 자금성 앞에 서 있는 천안문까지 나무를 심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현재 단문 앞뒤에는 나무가 심어져 있지만, 이것은 신해혁명 이후에 심은 것이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그늘하나 없는 어도(御道)를 걸어가면서 저절로 황제의 권위에 짓눌리는 심리적 효과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또 다른 가설은 황제는 음양오행에서 토(土)를 상징하며, 나무(木)는 토를 이기기 때문에 나무를 심지 않았다는 설이다. 태화전과 중화전과 보화전의 기석은 “土”자 형태를 구성하고있다.

 

 

 

 

4) 자금성의 공식 이름은 무엇일까?

현재 자금성의 공식 이름은 “고궁박물관(故宮博物館, The Palace Museum)”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는 “자금성(紫禁城,

The Forbidden City)라고 부른다. 자금성은 1987년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가입되었다. 자금성이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것은 허리우드 영화

<마지막 황제>의 영향이 크다. 화려하고 신비한 황궁의 모습과 마지막 황제 푸이()의 굴곡진 인생을 담은 <마지막 황제>는 중국의 자금성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경산공원(景山公園)

경산공원은 13세기 금조 말기와 원조초에 황실어원으로 개발되기 시작, 명조와 청조시기에 대규모 개조와 확건을 했고 명조 영락 18년(1420년)

에 고궁의 황성하와 북해공원에서 파낸 흙을 쌓아 인공으로 만들어진 산으로서 당시에는 《진산》으로 불리웠고 후에는 또 《만세산》으로 불리

웠다. 그후 봉선정을 수리하여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낼때 사용하고 관덕전을 지어 련무를 관람하고 황손 및 대신들의 도덕품행을 관찰할때 리용,

그후에 봄나들이를 하고 달구경을 하기 위해 영사전과 호국충의묘를 지었다. 그외에도 여러가지 관목과 화초 및 과일나무를 재배하고 학, 사슴

등을 기르기도 했단다.청조 순치 12년(1655년)에 이르러 경산으로 개칭되였고 건륭 16년(1751년)에 만춘정(万春亭), 집방정, 부람정 등 정자를

건설했으며 그외에도 《숭정황제자액처》를 지정후 하마비(下马碑)를 세웠다고 한다. 이 기간에 규모가 웅대하고 설계가 정교한 황실어원건설을

기본상 마무리 하였다. 수백년간 황실성원들과 고관대작들만 드나들던 이 황실정원은 1928년에 이르러 신비한 면사포를 벗고 정식으로 공중들

에게 개방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후 우리나라에서는 경산공원내의 중점건축물들을 수차 수선했으며 1954년에 수황전을 북경시소년궁으로 개칭,

1955년에 경산공원을 다시 개방했고 북경시인민정부에서는 1957년에 경산공원을 첫패의 고대건축물 중점보호단위로 지정했다. 1981년 공원

관리측에서는 명나라 숭정황제가 리자성봉기군이 입성하자 관묘정아래의 나무에 목매여 자살한 자리에 고목을 옮겨심었고 1998년에 만춘정내

에 대일여래불상을 복원하여 국내외 관광객들의 한결같은 호평을 받았다.

 

 

 

 

중국 중앙박물관 건물이다.

 

 

우리나라 국회의사당에 해당되는 건물.

 

 

천안문광장과 멀리 천안문.


 

 

 

 

 

 

 

천안문의 전경.

 

 

 

 

 

 

 

 

천안문광장에서.

 

 

 

 

 

 

 

 

 

 

천안문 모택동 사진앞에서.

 

 

 

 

 

 

 

 

 

 

 

 

 

 

자금성으로 들어서서.

 

 

 

 

 

 

 

 

 

 

 

 

우리나라 왕궁과는 비교도 안될만한 크기의 자금성.

 

 

 

 

 

 

 

 

 

 

 

 

 

 

 

 

 

 

자금성 최고의 건물

 

 

 

 

 

 

 

 

황재의 자리.

 

 

 

 

 

 

 

 

 

 

 

 

경산공원이 올려다 보인다.

 

 

 

 

자금성 후문으로 나온다.

 

 

 

 

 

 

 

 

 

 

 

 

경산공원에서 내려다본 자금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