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산행

2019. 12. 25일 강화 정족산 (222m)

소담1 2019. 12. 30. 19:47


산행장소 : 강화 정족산(鼎足山 222m,전등사)

산행일자 : 2019년 12월 25일 수요일

산앵인원 : 남편과 둘이서

산행경로 : 온수교회-북문성돌이길-북문-정족산정상-서문-성돌이길-남문-전등사-동문-달맞이고개-온수교회

산행시간 : 09 : 30 ~ 12 : 00 (2시간30분)


강화 정족산(鼎足山 222.5m).

정족산은 산의 생김새가 마치 세 발 달린 가마솥과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산이다. 정족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강화도에서 가장 큰 사찰인 전등사와 정족산성 등 많은 유물이 남아 있다. 특히 정족산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터가 남아 있어 유적답사 및 가족산행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산행은 전등사에서 시작된다. 전등사의 요사채 뒤로 난 길을 곧바로 올라가면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정상에서는 나무에 둘러싸인 전등사의 고풍스러운 모습과 마니산과 서해바다의 모습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다.



정족산성

인천광역시 강화군(江華郡) 길상면(吉祥面) 온수리(溫水里)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 둘레 약 1000m. 축성연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으며, 다만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로 인해 삼랑성 또는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곽의 축조는 거친 할석(割石)으로 되어 있으며 성내도 할석으로 채워 안팍을 겹축하였다. 보은(報恩)의 삼년산성(三年山城)이나 경주 명활산성(明活山城)과 같이 삼국시대 석성구조를 보이고 있다. 고려 고종은 1259년 풍수설에 따라 이 성내에다 가궐(假闕)을 지었다고 한다. 1660년(조선 현종 1)에는 마니산사고에 보존해오던 《조선왕조실록》을 성내의 정족산사고로 옮겼다. 이때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譜閣)이 같이 건립되었다. 현재 사고와 선원보각은 모두 없어지고 전등사(傳燈寺)만 남아 있다. 삼랑성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계속적인 보수가 있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첩지로 유명하다. 사적 제130호.


강화 전등사.

마니산에서 남쪽으로 자락을 이어온 정족산 기슭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는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때 아도화상이 신라로 가는 길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유서깊은 고찰이다. 전등사를 감싸고 있는 정족산성 안에 궁궐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한때는 고려 왕궁의 원찰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의 가람은 고려 충렬왕때를 기원으로 보는 경향이 높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충렬왕 8년(1282) 왕의 원비인 정화궁주 왕씨가 송나라에서대장경을 가져오게 하여 이 곳에 보관했으며, 이와 함께 불전에 옥으로 된 등잔을 올린 뒤 사찰의 이름을 전등사로 했다는 기록이 가장 신빙성있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전등사는 남문과 동문이 있다. 이 두개의 문은 모두가 사찰의 일주문과는 거리가 먼 산성의 대문이다. 어디로 들어가나 울창한 숲길을 조금만 걸으면 전통찻집인 다래헌 앞에 닿는다. 다래헌 앞으로 2층의 누각인 대조루가 있고, 그 아래를 지나 대웅전 앞마당에 오르게 된다. 즉, 전등사에서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건물이 대조루인 셈이다. 대조루를 지나면 바로 정면에 대웅보전이 1미터 정도 높이로 다진 터 위에 올라앉아 있고 동쪽으로는 요사채 서쪽으로는 향로전, 약사전, 명부전, 극락암, 적묵당, 종각이 나란이 배치되어 있다. 또한 서북쪽 정족산 중턱에 삼성각이 있고 그 아래 장사각과 선원보각터가 있다. 전등사에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곳이 바로 대웅보전이다.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보전은 광해군 13년(1621)에 지어졌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 건물에 겹처마 팔작지붕과 배흘림 기둥을 갖고 있는데, 지붕의 곡선이 심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건물의 기둥 네 모서리에는 나녀상(裸女像)에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거기에 얽힌 전설이 재미있다. 절을 짓는 도편수가 정을 주던 아랫마을 주모가 그가 맡긴 돈을 챙겨 달아나자, 평생토록 무거운 처마를 이고 있으며 죄 갚음을 하라고 나녀상을 새겨 넣은 것이라 한다. 그 모습이 얼핏 보면 원숭이 같기도 하여 전설을 모르고 가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또한 네 곳중 다른 세곳은 나녀가 두손으로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반해, 정면 왼쪽의 나녀상만은 한손을 내리고 있다. 마치 벌을 받다가 잠시 딴청을 피우는 모습이어서 나녀상을 만든 목수의 재치와 익살을 느끼게 한다. 대웅전 내부에는 목조로 된 석가가 본존불로 안치되어 있고, 아미타, 약사여래의 삼세불좌상이 나란히 봉안되어 있다. 이 밖에도 정화궁주가 시주했다는 옥등과 청동수조, 105매에서 하나가 빠진 104매의 대장경판이 아직도 남아 있다. 대웅전 앞 마당의 오른쪽에는 400년이 된 느티나무가 서 있고, 그 옆에 큰 바위를 방패삼아 종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 있는 범종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중국의 종임에도 불구하고 보물 제 393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가 164cm, 밑 지름이 100cm인 이 종은 중국 송나라에서 조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나마도 본래부터 전등사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일제시대때 공출당했던 동종을 찾다가 부평의 군기창에서 일본군이 버리고 간 현재의 종을 대신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이곳에 있는 종은 실제로 타종을 하지 않는다. 대신 이 대조루 오른쪽에 또 하나의 종루가 있다.이외에도 대웅전 오른쪽에 위치한 약사전이 보물 17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삼성각에 오르면 서해바다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또한 다래헌 앞에서 남문쪽 방향으로 키 큰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정작 은행알은 한톨도 열리지 않는다는 전설의 나무다. 옛날 관음보살이 현신해서 전등사를 관의 핍박으로부터 구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오늘은 성탄절 휴무일이다. 아침에 일어난 남편은 어디를 가려고 하는지 생각이 깊다. 조금 뜸을 드리던이 우리 작년에 강화 정족산과 평화전망대 그리고 교동에 갔다 왔는대 참 좋았지 하며  가까우니 그곳에 한번 더 다녀오지고 한다. 갔었곳인데 또가? 하니 대룡시장에 가서 맛있는것도 먹고 놀다오자고 한다. 지금은 인천에서 김포까지 고속도로가 뚫려 금방 가기는 한다. 준비하고 출발하여 대곶IC를 빠져나와 초지대교를 건너고 집을 출발한지 1시간만에  정족산 전등사 동문 주차장앞에 도착했지만 주차장을 그냥 지나친다. 왜? 그전에 왔을때는 이곳에서 올라갔자나 하니 2000원의 주차료도 아깝고 전등사 입장료 3000원도 아깝다며 길상면 소재지인 온수리를 지나 온수교회앞 넓은 주차장에 도착을 한다. 차한대 없는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오늘 성탄예배를 보러오면 차 못빠져 나갈턴대 하는 걱정이 앞서서 뒷쪽에 세우지 하니 빨리 올라갔다 내려오지 하며 말도 안듣고 탁구장앞을 지나 오솔길로 성큼 올라간다. 그바람에 산행하고 내려오니 몇겹씩 주차된 차들에 막혀 꼼짝 못하고 1시간 이상 예배가 끝날때까지 기다리다 출발하는 바람에 평화전망대는 시간이 없어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밭길 오솔길을 걸어 조금 올라가니 등산로가 시작이되며 수북히 쌓인 난엽길이 완만하게 이어진다. 온수성공회성당0.65km,전등사북문1.54km라고 쓴 어주 작은 이정표를 만난다. 이곳에서 북문 반대방향으로 올라가면 달맞이고개가 나오는대 그것도 모르고 이정표만 따라 열심히 북문쪽 방향으로 산허리길을 따라가다 좌측으로 밧줄 안전 난간을 잡고 조금 올라가니 북문이 나온다. 좁은 암문을 들어서 내려가면 전등사로 가는 길이고 우리는 성돌이길을 따라 10분정도 올라  정족산 정상에 올라선다. 안개로 조망은 좋지 않으나 앞쪽 진강산과 조금 멀리 혈구산과 고려산 봉우리가 얼굴을 내밀고 있다. 아랫쪽으로는 길상면소재 마을들이 내려다 보인다. 정상에는 정상석은 서있지 않고 그대신 이정목에 색바랜 매직팬으로 삼랑성정상 기둥에는 정족산이 써있다.방향표시로는 북문과 서문방향을 알려주고 있다.그 앞쪽으로 암봉이 최정상이다. 정족산은 산의 생김새가 세발달린 가마솥과 같다하여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정상에서 서북방향으로 길상면일대와 양도면 일대의 마을과 추수가 끝난 늘녘이 바둑판처럼 잘정돈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서쪽 초피산뒤로 민족의 영산이며 강화의 최고봉 마니산 참성단 그리고 함허동천이 조망이된다. 잠시 돌아보고 성곽길을 따라 서문으로 하산을 한다.


서문에서도 아랫쪽으로 내려가면 전등사가 나온다. 성곽을 따라 삼랑성 서문앞에 도착을 한다. 아치형은 붉은 벽돌로 만들었고 벽은 큰돌을 쌓아 만들어진 서문에서 반쯤 열어논 성문을 빠져 나갔다 들어와 가파른 성곽을 따라올라 전등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넓은 봉우리에 도착을한다. 다녀온 정족산 정상과 반대편으로 길상산과 초지대교로 가는 도로끝에 초지대교와 김포땅까지 내려다 보인다.성돌이길을 따라 남문으로 내려간다.정족산 삼랑성문 네곳중 유일하게 남문에만 문루가 있다.남문을 "宗海樓"라고 부르고 현판이 붙어있다.잠시 남문을 나섯다 들어와 보호수앞을 지나 전등사 경내로 올라간다. 전등사 대웅전은 지금 보수중으로 천막으로 가려져 있다.전등사는 조선 중기때 만들어진 건물로 규모는 크지 않지만 단아하고 고풍스럽다.보물로 선정된 목조건물로 기둥네군대 에는 전설의 나부상이 이목을 끌고 대웅전 서쪽으로 명부전과 약사전이 나란히 서있고 이 건물 또한 보물로 지정이 되있다. 그전에 왔을때는 윤장대(팔각형모양으로 돌릴수있게 만들어져 내부에 불경이 들어있어 돌리며 불경을 외우고 소원을 빈다)가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다. 죽립다원 찻집을 지나면 무실전이 있다. 강설단(스님들이 경전공부를 하는곳) 범종각 삼성각 요사체 극락암등은 돌아보지 않고 동전이 가득한 우물을 지나 보호수를 지나 대조루앞 계단을 내려와 동문으로 향한다. 동문을 지나 가파르게 이어지는 성곽길을 따라 달맞이고개에 올라선다. 그리고 출발했던 온수교회 주차장에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30분 만에 도착을하니 예배가 11시에 시작되 12시넘어 끝난다고 하는대 맨앞쪽에 주차를 해놔 오도가도 못하고 꼬박 1시간이상을 기다리더 예배가 끝난뒤 차를 움직일수 있어 결국 평화전망대는 포기하고 교동으로 출발을 한다.



                   온수교회의 모습.


                     온수교회에서 정족산 올라가는길.


                       완만한 낙엽길.




                이곳에서 직진하면 고개 우틀하면 북문.


                     성곽이 보인다.


                      북문의 모습.








                       진강산이 보인다.


                     길상면소재지인 온수리가 내려다 보인다.





                          정족산 정상의 모습.



                       정상에서.


                      진강산과 멀리 혈구산 고려산 봉우리가 안개속에 묻혀있다.


                      정족산 정상목앞.


                     정상에서 바라본 마니산과 앞쪽 초피산의 모습.


                        정상 암봉에서 마니산쪽으로.







                       서문가는길.



                        서문앞에서.




                       정족산 정상쪽.


                       조망터에서 내려다본 전등사전경.





                          초지대교 가는길은 안개뿐.



                       정족산 성돌이길.





                     남문으로 내려가는 성곽길.



                        남문이 보인다.


               영조 15년인 1739년에 중수하면서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라 명명하였는데 그동안 훼손되었던 것을 1976년 남문을 다시

            복원하고 종해루를 세운 것이라 한다.



                      남문에서.




                죽림찻집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데 출입구 좌우로 나무로 깎아 만든 학으로 찻집으로 들어서는 손님들을 환영한다.





                      전등사의 제1의 건축물인 대웅보존은 그리 크지 않지만 보물178호로 지정되어 있는 가치가 높은 건물로 광해군 때 지어졌으며 건물 내부 천장은 용과 극락조 그라고 연꽃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 눈에 띄며 외부에는 전설의 고향에서도 몇 번씩 소개되었던 나목의 여인상이 4각의 기둥위에서 위 서까래를 떠받치고 있다.


                    동전이 가득한 우물에서






                        전등사 나부상.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되는데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며 불사가 끝나면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보자고 굳게 약속을 하고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도편수가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굳게 약속을 했던 여인은 자취를 감추었고 이웃집 여자의 말에 의하면 며칠 전 야반도주했다는 것이다.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고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는데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단순히 사랑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 먼 여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다. 또 그런 조각상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으리라.그렇기에 전등사 대웅보전의 나부상은 보면 볼수록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





                       대조루 계단을 내려와 동문으로 향한다.



                        동문가는길.




                    동문우측에 양현수 승전비가 있는데 내용은 1866년(고종 3) 병인 양요 때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과 맞서 싸워 프랑스군을

                 패퇴 시켰을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달맞이고개 올라가는성곽길.









               달맞이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