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홀로 산행

2019. 06. 11일 수원화성성곽길

소담1 2019. 6. 13. 11:58


트레킹장소 : 수원화성 성곽길(행궁포함)

트레킹일자 : 1019년 6월 11일 화요일

트레킹인원 : 남편혼자

트레킹경로 : 수원역-경기도청-화성관광안내소-남서암문-팔달산(서장대)-수원행궁-화서문-장안문-화홍문-동장대(연무대)-동삼치-

                  남수문-영동시장-팔달문-수원역

트레킹시간 : 10 : 40 ~ 14 : 40 (4시간)


수원 행궁

화성행궁은 임금님의 행차 시 거처하던 임시 궁궐로 모두 576칸이나 되는 국내 최대의 규모로서,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깃들어 있다. 정조는 1789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옮긴 이후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쳐 수원행차를 거행했으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1795년에는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는 진찬연을 여는 등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부 유수가 집무하는 관청으로도 활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갖가지 용도의 건물로 이용되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되었다.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부터 복원 공사를 시작해 2003년 일반인에게 공개하였다.





수원화성

수원 화성(사적 제 3호)은 팔달산과 그 동쪽의 낮은 구릉과 평지를 감싸며 쌓은 평산성(평지와 산을 이어서 쌓은 성)으로 타원형태를 이루고 있다. 성의 전체둘레는 5.744km이고 높이는 4.9~6.2m이다.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마련하게 위해 신도시 화성을 계획하게 되었다. 수원 화성은 당시의 최첨단 과학과 건축술이 빗어낸 역작으로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화성 건설에 관한 모든 과정은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에 모두 담겨 있다.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한국의 세계적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사적 제3호. 수원화성은 1796년에 축성된 읍성의 하나이다. 그러나 다른 지방 읍성들과의 차이점은 정조가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능인 영우원(永祐園)을 화산(花山: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융건릉)으로 옮겨 명칭을 현륭원(顯隆園)으로 고쳤으며 능행을 위한 행궁을 화성 안에 건축하였다는 점이다.정조는 1789년(정조 13)에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永祐園)을 수백 년간 수원도호부가 있던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개명(改名)하고 수원 도읍을 새 장소인 지금의 팔달산 아래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원부로 부르던 고을 명칭을 화성(華城)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줄곧 수원은 화성이란 이름으로 사용되었으나 1895년 지방 관제개편 과정에서 다시 수원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고 지금은 수원시로 불리고 있다.수원부를 옮기고 정조 17년(1793)부터 화성 축조가 본격적으로 준비되어 이듬해 정월부터 시작해 2년 반 만인 1796년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성벽 전체 길이는 당초 정약용이 생각했던 4㎞보다 늘어난 5.4㎞ 정도이다. 성곽 시설에서도 적대나 누조, 공심돈, 포루 등과 같이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시설이 많이 도입되었다.성벽은 돌로 쌓았으며 높이는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4∼6m 정도이고 성벽 위에는 1m 정도 높이의 여장을 두고 여장에는 총안을 뚫었다. 성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배가 안으로 들어가는 규형(圭形) 쌓기를 기본으로 했다. 성벽에는 4개의 성문을 두었고 암문 5개를 설치해 통행토록 하였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앙에는 행궁이 자리 잡았다. 화성이 위치한 지세는 서쪽에 팔달산이 있고 그 반대쪽인 동쪽에도 나지막한 구릉이 있으며 이 동서 경사지 사이를 북에서 남으로 개천이 흐르고 그 주위에 약간의 평지가 펼쳐진다. 화성을 비롯해 우리나라 성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불규칙한 형태로 쌓아나가는 것이 특징이다.성문은 동서남북에 4개가 있는데 북문이 장안문이고 반대 남쪽이 팔달문이다. 동서에 청룡문과 화서문이 있다. 남북문은 중층문루로서 도성문루에 버금가는 규모와 형태를 갖고 있다. 암문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는 출입구를 내서 사람이나 가축이 통행하고 양식을 나르는 통로이다. 화성에는 모두 5곳에 설치되어 있으며 대개 벽돌을 많이 사용했고 원여장 등의 특수한 장식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암문에는 보통 건물을 세우지 않지만 서남암문에만 예외적으로 포사를 설치했다. 이외에도 수문 2곳, 적대 4곳, 노대 2곳, 공심돈 3곳, 봉돈 1곳, 치성 8곳, 포루 10곳, 장대 2곳, 각루 4곳, 포사3곳 등의 시설이 있다.



                     전철타고 수원역에 도착.




                     경기도청 올라가는길.




                       경기도청앞에서.




                   화성관광안내소.


                      성곽 출입구앞.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이다.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으며 이 문은 용도(甬道: 담을 양쪽으로 쌓아 만들길)의 출입문이기도 하다. 5개의 암문 중에서 유일하게 포사(舖舍)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796년(정조 20) 8월 6일 홍예가 완성되었다. 포사(舖舍)는 성 밖의 위험을 성 안으로 알리는 역할을 하는 시설이다. 깃발을 휘두르거나 대포를 쏘아 위급신호를 전달하였다 


                      남서암문앞.





                       세계문화유산 표지석앞.


                        매표소.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이다. 화성에서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있으며 '화성장대(華城將臺)' 란 편액은 정조가 친히 쓴 것이다. 1794년(정조 18) 8월 11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29일 완성되었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 윤 2월 12일 현륭원(융릉) 참배를 마치고 서장대에 올라 성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주간훈련과 야간훈련을 직접 지휘하였다.


                         서장대앞.


                       멀리 광교산이 보인다.


                       수원 화성행궁과 멀리 월드컵경기장.




노대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게 지은 시설이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두 곳이 있다. 서노대는 팔달산 정상에 위치하여 사방을 볼 수 있으며 정팔각형 평면이며 기와 벽돌로 쌓았다. 




                         정조대왕 동상앞.


                       수원 화성행궁 입구 홍살문.



                      행궁 출입문인 신풍루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 (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입니다. 1790년(정조 14)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 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 하였다. 1795년 봉수당 진찬례 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 하였고, 중양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던 바 있다



                      왕의 집무실인 봉수당.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 (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1789년(정조 13)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 되었다.


                               옥좌.


    


우물.제정은 화령전의 제례에 사용될 정화수를 뜨는 우물로 어정이라고 한다. 화령전 제정은 정방향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4면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 올렸다. 높이는 5.5m이고 바닥에서 물이 고인 높이는 약 4m이다. 









서북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설이다.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도 하였다. 서북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하나로 숙지산이 마주보이는 자리에서 화서문 일대의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만들었다.


                           화서문.




화서문은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이다. 1795년(정조 19)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1월 8일 마쳤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옹성 안 호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화서문앞에서.






                        장안문.


장안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이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일 마쳤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의미한다. 장안문은 우진각 지붕(지붕면이 사방으로 경사지게 되어있는 형태)으로 규모가 웅장하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 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적대는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성문 좌우 옆에 있는 치성 위에 세운 시설이다. 4대문 중 장안문과 팔달문 양쪽에만 설치하였다. 장안문의 동쪽에 위치한 북동적대의 높이는 성벽과 같다. 치성 밖 아래쪽에 3개의 현안(위아래로 길게 낸 구멍)을 만들어 성 아래 가까이 다가온 적들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화홍문과 동북각루




                              수원천.


화성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 위에는 북수문과 남수문 두 개의 수문이 있다. 북수문은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5년(정조 19) 1월 13일에 완성되었다. 별칭은 화홍문으로 화(華)자는 화성을 의미하고, 홍(虹)자는 무지개를 뜻한다. 장쾌한 물보라가 수문으로 넘쳐나는 모습이 아름다운 곳이다. 


방화수류정은 1794년(정조 18) 10월 19일 완공되었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화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다. "꽃을 찾고 버들은 따나 노닌다(訪花隨柳)" 라는 뜻을 지닌 방화수류정은 독특한 평면과 지붕형태 때문에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화성에서 가장 뛰어나며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보물제1705호 방화수류정(동북각루)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머물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동장대는 1795년(정조 19) 7월 15일 공사를 시작하여 8월 25일 완공되었다. 무예를 수련하는 공간이었기에 연무대(鍊武臺)라고 하였다. 이곳의 지형은 높지 않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솟아 있어서 화성의 동쪽에서 성안을 살펴보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열기구가 둥실 떠오른다.





공심돈은 성곽 주위와 비상시에 적의 동향을 살피기 위한 망루와 같은 것으로 화성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화성에는 서북공심돈 · 남공심돈 · 동북공심돈이 있다. 동북공심돈은 1796년(정조 20) 7월 19일 완성되었다. 형태는 커다란 둥근 원의 모습으로 화성 성곽내에서 가장 특징이 있는 건물의 하나이다. 동북공심돈 내부는 소라처럼 생긴 나선형의 벽돌 계단을 통해서 꼭대기에 오르게 되어 있어 일명 '소라각' 이라고도 불린다. 





창룡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동쪽 대문으로 1795년(정조 19) 5월 8일 터담기 공사를 시작하여 10월 17일 완공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문루가 파괴되었던 것을 1976년 중건하엿다. 창룡은 곧 청룡으로 풍수지리상 좌청룡 우백호를 통해 동쪽을 의미한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반달모양으로 쌓았는데 장안문, 팔달문과 달리 한쪽을 열어놓았다. 옹성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서는 성문 공사를 맡은 사람들과 책임자들을 기록한 공사설명관이 있다. 




    화성의 봉돈은 성곽과 맞물려 벽돌로 만들어진 우리나라 성곽 양식에서는 보기 드문 시설물로 그 규모와 외관이 마치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고 장려(壯麗)하게 축조되었다. 화성의 봉돈은 화성의 사방경계와 정찰임무를 하며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을 통해ㅐ 신호를 하였다. 용인의 석성산 봉화가 응답하고 서쪽으로 서해안의 홍천대 봉화가 등답한다.                   


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건물이다.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도 하였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성 안팎의 시야가 가장 넓은 곳이다. 남수문 방면의 방어를 위하여 남공심돈과 마주보며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남수문은 수원천이 화홍문(華虹門)에서 남쪽으로 흘러 내려와 성곽과 다시 만나는 지점에 만든 수문이다. 7칸 홍예(虹蜺)인 화홍문과는 달리 수원천 하류 수량증가에 대비하여 9칸의 홍예로 만들어졌다. 1796년(정조 20) 1월 16일 홍예공사를 완료한 후 같은 해 3월 25일 성밖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포사가 만들어졌다. 1864년 홍수로 1848년 다시 만들었으나 1922년 홍수로 또다시 유실된 이후 일제강점기인 1927년 전부 철거되었다.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이 지닌 역사 ·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하여 수원시에서 2010년 9월 복원을 시작하여 유실된 지 90년이 지난 2012년 6월 제 모습을 찾았다.              






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남쪽 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집입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 위해 이곳을 통과했다고 한다. 1794년(정조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15일에 완공되었다.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에서 비롯한 이름이며 축성 당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었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