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장소 : 해남 전라 우수영(울돌목)
여행일자 : 2013년 7월 23일 화요일
전라 우수영 관광지.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1161번지외에 있는 지방기념물 제139호로 지정된 전라우수영은 조선조 세종8년(1426년)에 설치 고종32년(1895년) 폐쇄
될때까지 약500 여년동안 서남해안을 지켜온 해군기지이다. 전라우수영 성자는 기념물139호이며 진도대교를 건너기전 해남땅에 위치한다.
명랑대첩.
역사성을 지닌 전라우수영이 표면에 들어난 계기는 임진왜란당시 이순신장군이 대승한 명랑대첩이다.
이순신장군이 옥에서 풀려나 권율휘하에 있다가 백의종군하던중 나라가 위태로움때문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받고 그날로 회룡포에이르러 간신히
남아있는 12척의 범선을 수습하여 이곳 우수영에 당도했다. 이때 왜군은 400여척의 배와 2만명의 군인을 싣고 울돌목을 통과하여 예성강으로 진출
이미 직산에 머물러있던 육군과 한양도성을 침범하려는 계획이 있으나 일본군에있어 울돌목 장악은 중요한 큰과제였다. 장군은 울돌목의 지형조건을
파악하고 전투준비를 치밀하게 해나갔다.쇠사슬 두줄을 안목과 밖목에 건너매 올렸다 내렸다 할수있도록 울돌목에 장치해두고 장수들을 불렀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하면 살고 살려하면 죽는다" 또 한사람이 길을 막으면 천사람을 두렵게 할수있다.하였으니 이것이 지금의 우리의 이름이다.
살생각 하지말고 조금도 명령을 어기지말라 하여 임전결의를 다지고 1597년9월16일 드디어 어란포에 머물고있던 일본수군들이 밀물을 타고 명랑을
공격해왔다.이순신의 12척의 배도 이들을 공격하니 왜선이 이순신의 배를 포위하여 격전이 벌어젔으나 장군은 마다시를 향하여 시위를 당겼다.
이때 기다리고있던 조수가 썰물로 돌아서자 마다시와 기함을 잃은 왜군들은 혼비백산 도망가기에 바빳다. 이때 대파된 왜선은 1백33척이다.
해전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대승이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명랑대첩이다.
명랑
바다가 운다고해 명랑이라 이름이된 울돌목은 해남군 우수령과 진도군 녹진사이를 잇는 가장 협소한 해협으로 넓이가 325m 가장깊은곳의 수심이 20m
유속이 11.5노트에 달해 굴곡이 심한 암초사이를 소용돌이치는 급류가 흐른다.이러한 빠른물길이 암초에 부딪쳐 뒹겨져 나오는 바다소리가 20리 밖까지
들리다고 한다.
함께 산악회에 다니는 지인부부와 진도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올여름 장마는 중부지방에 집중적으로 퍼붙는바람에 많은 피해를 주고있다. 아침 7시에 승용차 하나에 4명이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다. 진도에도 비가내려 여행은 커넝 콘도에만 있는것 아닌가 은근히 걱정이된다.하지만 일기예보에 예보된것처럼 군산을 지나니
점점 비가 숙으러 들던이 고창땅에 들어서니 날씨가 좋아진다. 서해안 고속도로 종점인 목포로 들어서 영산강 하구뚝을 지나 해남으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조금지나 진도로 향하다 진도대교가 보이는 우측으로 넓은 주차장과 전라우수영이라는 기와문이 보인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일인1,000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우수영으로 들어서 이순신장군께서 왜군을 무찌른 명랑대첩승리탑과 기념전시관,
그리고 해안 데크길을 걸어 전망대에 올라 진도대교와 울돌목을 바라보고 진도대교아레 울돌목에 소용돌이치는 바닷물도보고 진도대교를 건너
진도땅에 발을 딧고 진도군청앞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첨찰산 산행을 하러 떠난다.
해남땅 전라우수영에서 진도대교와 진도땅을 찍어본다.
좀 엉성해보이는 전라우수영 정문의 모습.
정문앞에 서서.
명랑대첩탑 앞에서.
명랑대첩탑에서 울돌목과 진도대교를.
전망대 팔각정에서 진도대교를.
홀로 울돌목을 바라보는 이순신장군의 상.
진도대교 아래에서.
멀리 진도땅 산위에 전망대가 건설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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