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산행

2022. 09. 22일 인천상륙작전 전적지 72주년 도보순례

소담1 2022. 10. 4. 15:35

트레킹장소 : 인천상륙작전 맥어더길

트레킹일자 : 2022년 9월 22일 목요일

트레깅인원 : 300명중 남편과 동행

트레킹시간 : 10 : 30 ~ 12 : 30 (2시간30분)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

1950년 9월 15일 새벽 유엔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의 지휘로 실시된 인천 상륙 작전은 6·25 전쟁의 전황을 역전시키는 전기가 되었다. 인천 상륙 작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상륙 지역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중 폭격이 9월 4일부터 15일까지 계속되었다. 미국 해병대 항공기는 9월 10일에 네이팜탄으로 월미도를 폭격한 이래 65회에 걸쳐 인천 지역을 폭격하였다. 9월 15일 새벽 맥아더가 직접 관측하는 가운데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 작전은 2단계로서 제1 단계는 월미도에 상륙하여 점령하는 것, 제2 단계는 인천에 상륙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유엔군은 인천의 세 개 지점에서 상륙 작전을 감행하였다. 제1 단계 작전 대상인 월미도를 그린 비치[녹색 해안]라 칭했고, 제2 단계 작전 대상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 낙섬 사거리는 각각 레드 비치[적색 해안]와 블루 비치[청색 해안]라 명명했다.제1단계였던 월미도에 대한 상륙 작전은 오전 5시 공격 준비 사격으로 시작되어, 오전 6시 30분경 상륙하여 오전 7시 50분에 월미도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제2단계 상륙은 오후 만조 시에 이루어졌다. 미국 제5 해병 연대는 오후 5시 30분경 레드 비치에 상륙하여 묘도 고지를 점령하였고, 미국 제1 해병 연대는 비슷한 시각에 블루 비치에 상륙하였다. 그날 밤늦게까지 상륙 지점 인근 소탕 작전을 완료한 뒤 9월 16일 오전 7시 30분 두 해병 연대가 상호 합류하여 인천 전역에 대한 수복 작전에 임하였고, 해질 무렵 인천시의 대부분을 점령할 수 있었다.인천 상륙 작전 참전회에서는 상륙 작전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기 위해 1994년 9월에 오석 표지석을 블루 비치, 레드 비치, 그린 비치 3곳에 건립하였다.

 

인천자유공원(만국공원)

인천자유공원.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 일대에 있는 공원. 대한민국 최초의 서양 근대식 공원이기도 하다. 해발 69m의 야트막한 산인 응봉산 일대 전역이 자유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이 공원이 조성된 것은 구한말이자 인천항 개항 초기인 1888년이다. 당시 인천지역에는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외국인 거주자들이 꽤 있었는데 이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원이 필요했다. 그 결과 러시아 출신 토목기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이 공원을 설계했고 꾸준한 확장 작업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공원 조성 당시 시민들은 이를 각국공원(各國公園)이라고 불렀고 그 뒤 일본의 세력이 커지면서 1914년 각국 거류지의 철폐와 함께 공원 관리권이 인천부로 넘어가면서부터 공원 명칭이 서(西)공원으로 바뀌었다.1945년 해방 후에는 공원 명칭이 만국공원(萬國公園)으로 바뀌었다. 오늘날의 명칭인 '자유공원'으로 바뀐 것은 1957년부터다. 1950년 9월 인천 상륙작전을 지휘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만들었고 공원 남동쪽 부지에 장군의 동상을 세웠다. 공원 내에는 석정루나 연오정 등 팔각지붕의 전통 형식의 건물도 있다. 특히 석정루나 자유공원 광장에서 내려다보는 인천항 전경이 꽤 멋있는데 석양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

행사는 6.25전쟁 당시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한반도 역사의 향방을 바꾼 계기가 됐던 9.15 인천상륙작전의 영웅인 맥아더 장군을 표상화하고, 대한민국을 있게 한 애국열사와 영웅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맥아더 길’ 명예도로를 지정해 시민과 학생들에게 애향심과 애국심 함양의 계기로 삼고자 마련됐다.
‘맥아더 길’ 명예도로로 지정된 도로는 월미도 입구에서 자유공원 맥아더 장군 동상까지 1.75㎞ 구간이다.

 

한국자유총연맹 인천광역시지부는 올해로 72주년 맞는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해 참전용사, 청소년 등 회원과 시민 3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전적지 도보순례 행사를 개최했다.이번 도보순례는 인천시민들에게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간접 체험을 통해 잊혀가는 인천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고 나라사랑 정신과 인천사랑 정신을 함양시키기 위해 마련됐단다.코로나가 창궐하기전인 69주년 상륙작전기념 도보 순례레 참석했었는대 벌써 3년이 지났다. 코로나가 자자들면서 올해 행사가 열린다고해 신청하고 줄발하는 날이다. 8시30분 부터 9시10분까지 모자및 T셔츠를 지급하고 신청자 확인을 한다고 시간에 맞춰 오라는 문자를 받았다. 전철을 타고 인천역에서 내려 차이나타운을 지나 행사장인 자유공원 광장에 도착하여 간식과 물 모자,T셔츠를 지급받고 10시 식전행사가 이어지고 10시30분 맥어더길을 따라 월미도로 조별로 출발을 한다. 맥어더길을 따라 월미공원 그리고 월미산정상 그린비치 표지판 제2함대주둔지에서 해산하고 도시락을 지급받아 식사를 하고 인천역으로 나와 2사간30분 도보순례를 마무리 한다.

 

월미광장에서 내려다본 인천항 도크와 월미산.

1957년은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장군의 77회 생일이자 인천상륙작전의 7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국민의 성금을 모아 상륙작전 당시의 맥아더 장군 모습을 제작하기로 하였다. 내무부가 주관이 되어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진행하였는데 애초에 선택한 건립장소는 인천상륙작전 장소였던 월미도였다. 그러나 당시 월미도가 유엔군의 중요한 군사기지로 사용되고 있던 터라 그해 6월 인천의 만국공원으로 장소를 변경하였다. 장방형의 화강암 지대석 위에 역시 화강암으로 높은 대석을 마련해 청동상을 세웠다. 대석에는 음각으로 유엔의 상징과 ‘다그라스 맥아더 장군상 GENERAL OF THE ARMY DOUGLAS MACARTHUR’라는 문구가 3단으로 새겨져 있다. 동상은 두 다리를 벌리고 곧게 서 있으며 왼손은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을 허리 뒤쪽 호주머니에 슬쩍 꽂고, 오른손은 복부에서 쌍안경을 들고 있는 형태이다. 점퍼의 왼쪽 가슴에는 가로로 된 이름표가 있는데 영어로 ‘MACARTHUR’라고 표기되어 있다. 얼굴은 전면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동상 앞에 화강암으로 대를 마련해 표지판을 부착하였고 동상 뒤로는 후벽을 세워 상륙작전의 부조판을 부착하였다.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맥아더장군 동상은 인천시 중구 송학동 1-11번지 인천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자유공원 내에 소재하고 있으며 동상의 재원은 기단높이 3m, 동상높이 3m, 둘레 2m의 청동 주물로 주조되었으며, 맥아더정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57년 9월 15일 제작되었다. 우리민족이 영원히 잊지 못할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리라고 여겼고 미국의 전문가들조차 인천 상륙작전의 불리함을 역설하고 장군이 이 계획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기 위한 사절단마저 달려와 만류하였으나 그 자신은 오히려 모든 상황이 불리가기 때문에 적 사령관도 우리가 인천으로 상륙하리라는 예상조차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끝내 세계전쟁사상 그 유례가 드문 공을 세웠다.

  6·25 전쟁을 기념해 세운 첫 외국인 장군상이다. 이 동상을 세운 뒤에 만국공원을 ‘자유공원’이라 칭할 정도로 자유민주주의의 상징물이 되었다. 『근대문화유산 조각분야 조사보고서』에서는 이 동상에 관해 “인천상륙작전 7주년을 기념하여 국민의 성금으로 건립한 동상으로, 전후 자유에 대한 대한민국의 의지와 유엔에 대한 감사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역사적 기념물이다”라고 평가하였다.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 1. 26. ~ 1964. 4. 5) 주요 이력.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에 미국군과 연합군의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필리핀 식민지의 통치자였으며, 1945년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는 극동군의 지휘관을 지냈다. 또한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 역시 그의 관리 대상이었다. 1937년 퇴역하고 필리핀 명예 육군 대장으로 추대되었다가, 1941년 미국 육군 대장으로 복귀한 후 1944년 미국 육군 원수 계급을 받아 진급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일본의 항복이 있은 후 일본에 주둔하다가 한국 전쟁을 지휘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국군 사령관으로 참전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군이 대구까지 밀고 내려왔으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인민군들을 남북으로 양분시켰다.

 

인천시민헌장비.

행사장 무대앞에서.

접수확인과 모자 서츠 물을 지급받는 안내소.

식전행사전경.

도보순례모습.

차이나타운 앞을 지난다.

인천역도 지나가고.

맥어더길 표지석.

인천 상륙 작전 당시 연합군의 상륙 지점에 세워진 표지석은 1994년 9월에 인천 상륙 작전 참전회에서 건립한 것이다. 이들은 상륙 작전의 역사적 사실과 의미를 후세에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 표지석을 건립하였다. 표지석은 블루 비치, 레드 비치, 그린 비치의 3곳에 세워졌다. 각 표지석의 형태는 3곳 모두 화강암 좌대 위 오석 비석에 음각하여 글이 새겨진 모습으로 유사하다.

 

상륙작전 비앞에서.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다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한국전선을 최초로 시찰한 6월 29일에 이미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중 상륙작전의 대가로 이름을 떨친 그는 북한군의 거칠 것 없는 진격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 수단은 적 배후에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적 공격을 막지 못하고 전선 곳곳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와 같이 배후를 칠 생각을 한 것은 맥아더가 아닌 다른 장군이라면 참으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간만의 차가 심한 인천의 자연적 조건으로 작전의 반대에 부딪히다

​그러나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선택하는 데 대하여 미합동참모본부와 해군 및 해병대 측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인천의 자연적 조건이 대규모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부적절한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인천 앞바다는 간만의 차가 매우 심하기 때문에 상륙작전을 할 수 있는 날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맥아더가 계획하는 9월의 경우 15일부터 3일간이 가능하고, 이때를 놓치면 다음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 또한 상륙 가능 날짜에도 밀물이 꽉 들어차는 아침과 저녁 두 차례 각각 3시간 정도의 제한된 시간 내에 행동을 완료해야 한다.

 

두 단계를 요하는 상륙, 높은 벽의 해안 등의 문제로 다른 상륙지 선정을 요구받다

​둘째, 인천항은 대규모 상륙함대가 자리잡기에 협소할 뿐만 아니라 항구에 이르는 해상 접근로가 제한되어 있다. 상륙작전은 인천항에 앞서 먼저 월미도를 점령해야 하므로 아침에 월미도, 저녁에 인천을 점령하는 2단계를 거쳐야 한다.

​셋째, 높은 벽의 상륙해안을 기어오르기가 어렵고, 그것을 극복한 다음에는 곧 시가지에서 적과 교전해야 한다.

​미합동참모본부는 육군 및 해군참모총장을 파견하면서까지 맥아더에게 인천이 아닌 다른 상륙지를 선정하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요구했다.​맥아더, 적의 의표를 찌르는 기습효과를 위해 인천 상륙을 강행하다

​그러나 맥아더는 여러 사람이 반대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천을 선택했다. 즉, 아군뿐만 아니라 적도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의표를 찔러서 공격하면 전략적 기습효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적은 인천을 허술하게 지키고 있었다.

 

상륙부대로서 13,000여 명의 한국인을 포함한 해병과 보병 각 1개 사단이 편성되다

​맥아더는 상륙작전부대로서 해병과 보병 각각 1개 사단을 편성하고 한국군을 각각 1개 연대씩 배속시켰다. 미 제7보병사단은 약 8,600명의 카투사 병력을 포함하고 있어 상륙작전에 참가한 한국인 총병력은 13,000명에 이르렀다.

약 20%에 해당하는 이 병력은 인천시가지에서 적을 소탕하고 민간인 복장으로 숨어 있는 적을 모두 색출해냄으로써 지대한 공을 세웠다.

​유엔군, 허술한 인천의 방비를 뚫고 서울로 진출하다

​맥아더가 예상한 대로 인천의 적 방비태세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고, 9월 15일 새벽부터 개시한 상륙작전에서 유엔군은 약 2,000명밖에 되지 않은 적을 쉽게 제압하고 인천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약 3일 후부터 유엔군은 김포와 영등포 두 방향으로 진출, 서울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인천의 성공과 함께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기 시작하여 38도선 이남을 모두 회복하다

 

이와 같이 인천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남쪽의 낙동강 선에서도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3일에 전 전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인천 소식이 알려지면서 적 사기가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지고 도주병이 나오더니 드디어 전 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상륙작전 개시 후 약 보름 만에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이남을 모두 회복했다. 적은 약 10만 명의 병력을 잃었으며 북으로 도주한 자는 3만 명이 채 안 되었다.맥아더, 대담한 착상과 결단력으로 승리를 이뤄내다

맥아더 원수의 걸작 중에서도 걸작인 인천상륙작전은 전쟁사에서 전통적인 승리의 비법이 되어온 '망치(Hammer)'와 '모루(Anvil)'의 원리를 적용해 이루어낸 것이었다.

즉, 낙동강에서부터 정면공격에 의한 반격은 엄청난 손실이 따르므로 인천에 상륙해 모루를 만들고, 낙동강에서부터 망치를 휘둘러 그 안에 있는 적을 섬멸하는 개념의 작전을 구사한 것이다.

 

월미공원 입구문.

가을을 맞이해 월미공원은 꽃단장을 하고 있다.

공원입구 트릭아트

월미산 정상에서 바라본 작약도와 영종대교.

인천북항쪽 전경.

작약도와 영종대교쪽.

인천대교가 보인다.

영종 하늘도시가 건너다 보인다.

월미전망대.

사이로에 그려진 그림.

상륙지점중 한군데 그린비치 표지판.

월미 바다열차가 지나간다.

월미 문화관.

해군 2함대 주둔기념탑.

월미공원 입구문.

인천역앞 차이나타운 페루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