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킹장소 : 강화나들길 15코스(강화산성길)
트레킹일자 : 2022년 5월 28일 토요일
트레킹인원 : 남편과 둘이서
트레킹경로 : 서문(주차장)-연무당옛터-강화문화회관-남장대-남문-동문-성공회강화성당-용흥궁(공원)-
고려궁지(외규장각)-서문(주차장)
트레킹시간 : 10 : 30 ~ 14 : 00 (4시간)
강화산성(사적 제132호)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남문인 안파루·북문인 진송루·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복원 정비되어 있다.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격주로 산행을 떠나기에 산악회는 이번주 산행이 없는 주이다. 남편은 어딘가 가고싶어서 아침식사후 왔다갔다 심심해 하던이 강화나 갔다 오자고 한다. 강화에 있는 관광지나 산은 다 다녀왔는대 어디를 가자고 하니 그냥 떠나자고 한다. 대충 간식거리를 찾아메고 집을 나선다. 김포통진IC를 빠져나와 강화대교를 건너고 강화읍내를 횡단하여 강화나들길 15코스에 포함된 강화성곽길 서문주차장에 도착을 한다. 서문은 남문에 비해 조금 외곽에 있어 주차비도 없고 주차장도 넓다. 이른시간이라 한갖진 주차장에 차를대고 준비를하고 길건너 서문은 바라만보고 성곽길옆 연무당 옛터 표지석앞으로 다가간다. 강화산성은 강화읍을 울타리처럼 둘러져있는 성벽이다. 지금서있는 연무당터는 일본과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등 굴욕적인 조약과 수탈의 시발점이된 곳이다. 남산쪽으로 구불구불한 성곽이 이어진다. 그 끝지점에 남장대가 있다. 성곽으로 올라서 강화읍을 가로질러 흐르는 동락천을 건넌다. 그리고 성곽아래 3개의 아치형 수문을 내려다보고 강화공설운동장과 강화문화회관을 지나 허물어진 토성길을 걷다 성곽을 잠시 벋어나 나무그늘길로 오르다 암문에서 성곽길로 올라선다. 새로복원이 암문부터 남장대까지 이어진다. 원래 15코스는 국화리저수지를 경유해 멀리한바퀴 돌아오는대 우리는 그로 성곽길을 따라 남장대로 올라간다.
남장대는 남산 가장 꼭데기에 있는 2층 누각이다. 성곽안 공터는 넓다. 남장대앞으로 다가간다. 남장대는 강화산성 3개의 장대가 있었는대 그중 유일하게 남아있는건물이다. 북한산성에도 남한산성에도 가장 높은곳 시야가 좋은곳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 지휘소역활을 하는 곳이다.이곳 남장대는 허물어져 있던것을 2010년에 새롭게 복원했다고 한다. 강화읍 주변에서 가장 높은곳이라 조망이좋다. 강화읍은 물론 개성까지도 보이고 바다건너 김포땅 문수산이 잡힐듯 건너다 보이고 모내기가 끝난 벌판이 시원스럽게 내려다 보인다. 한참을 머물다 남문으로 내려가기위해 성곽길을 따라 내려오다 바람 시원한 곳에서 간식을 꺼내먹고 곧 남문앞에 도착을 한다. 남문 안쪽에는 안파루 외측에는 강도남문이라고 쓰여진 현판이 붙어있다. 남문의 현판은 전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씨가 썻다고 한다. 문밖으로 나가 고려궁 성곽길 쉼터의자에 앉아서 남문을 바라보고 견자산 으로 올라가는 성곽길이 아닌 시내길을 따라 동문으로 향한다. 동문으로 가기위해 언덕길을 걷다 예뿌게핀 5월의 장미 꽃길을 따라 동문앞에 도착을 한다.
동문을 망한루라고 부르며 2004년에 복원을 했고 성문밖 현판은 강도동문이라고 새겨져 있다. 다시 성문안으로 들어와 동문앞 주차장을 지나 함께가꾸는 강화돌담길 입간판 표지앞을 지나 용흥궁160m,대한성공회성당80m 이정표를 따라 성공회 강화성당으로 들어선다.당시만해도 규모가 대단히 큰 한옥형식의 목조건물로 참 그동안 관리가 잘되있다. 성당안으로 들어가니 의자도 옛날 나무의자 그대로이고 내부의 장식도 옛날 그대로이다. 한바퀴 성당내부를 돌아보고 나와 성공회강화성당 문을 나와 계단을 내려서 좌측골목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전 거쳐했던 용흥궁까지 둘러보고 용흥궁 공원끄트머리에 오래된 굴뚝이 하나보이고 직물기 하나가 전시되있디. 1980년대만 해도 이곳에는 80여군데의 직물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도 돌아보고 고려궁지로 향하며 천주교강화성당과 그 길건너 개교126주년이나된 강화초등학교앞을 지난다. 강화궁 관리사무소는 문이 닫혀있고 입장료가 있었는지 지금은 무료입장 이라는 팻말이 창문앞에 놓여있다. 계단을 올라서 승평문을 들어선다. 강화궁지는 모두 허물어 흔적을 찾을수 없고 새로 복원된듯한 큰건물 하나만 있다. 사또와 이방 형방등 모형이 안에있고 큰나무앞을 지나 고려궁지터 넓은 가운데 한체의 건물이 보인다. 그 건물이 외규장각이다. 2002년에 이곳에 복원된 건물로 프랑스군이 약탈해갔다가 반환된 297권의 책들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이라고 한다. 내부까지 들어가 보고나와 성곽길중 마지막 북문은 생략을 하고 읍내길을 따라 서문으로 내려온다. 아주 천천히 성당도보고 용흥궁도 보고 강화궁지터와 외규장각도 돌아보며 4시간 강화 성곽길을 걷고 집으로 향한다.
강화나들길은 "휴식과 놀이를 잇는 재미있는 길, 강화나들길!"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어제와 오늘의 삶을 잇는 길, 몸과 하나가 되는 건강한 길, 아름답고 낭만이 넘치는 길이다. 나들길은 총 20개 코스로 총 거리 310.5km에 달한다. 강화나들길 15코스 "고려궁 성곽길"은 고려궁지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이다. 강화산성 남문에서 시작하여 남장대, 국저수지, 서문, 북장대, 고려궁지를 거쳐 동문까지 이르는 코스다. 코스의 거리는 11km이며, 4시간 내외 소요된다.강화산성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길 때 도성으로 쌓은 성이다. 여러번 파손 되고 다시 세우기를 반복하다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강화산성 내성은 동서남북으로 난 대문 4개, 비밀통로인 암문 4개, 수문 2개, 지휘소 2곳이 있었다.
연무당은 조선과 외국이 맺은 최초의근대적 조양이였이였으나 조선에는 일방적으로 불평등이였던 조약 이고 일본에게 유리한 조약이였다. 강화도조약(조선수호조약,병자수호조약)이 조인된곳이다. 조선고종7년(1870년)에 창건된 연무당은 상시장 군 농협자리 서쪽에 있었는대 동소문 밖으로 옮겼다가 내성 서문에 당을 세우고 그 전면에훈련장이 마련되였다.
강화산성(江華山城)강화 석수문(경기유형 제67호)
강화 내성을 쌓을 때 강화읍 중심을 흐르는 동락천 위에 남문 옆의 성곽과 연결해 설치된 홍예수문이다. 1977년 서문 옆으로 옮겨왔다.연무당터 뒤쪽 개천에는 당초에 쌓았던 돌은 별로 없고 새로 다듬은 화강석이 더 많이 섞여 복원된, 세 개의 홍예로 이루어진 석수문이 있다. 석수문은 숙종 35년(1709) 강화 내성을 쌓을 때 강화읍의 중심으로 흐르는 동락천 위에 남문 옆 성곽과 연결해 설치했었다. 1900년 갑곶나루의 통로로 삼기 위해 나루 가까운 개천에 옮겼다가, 1977년 지금의 강화읍 관청리로 옮겨 복원했다. 길이 10m,높이 3.8m, 너비 4m.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7호이다.
성곽옆 그늘길로 올라가 암문에서 성곽길로 들러선다.
성곽을 오르다 뒤돌아본 강화공설운동장
남장대로 올라가는 성곽길.
남장대.
북문(북장대쪽)
남장대(사적132호)
성벽의 가장 높은 지점인 남산의 정상에 도달하면 강화산성의 3개 장대 중 유일하게 남은 남장대가 있다. 위치상 가장 중요한 장대라 할 수 있으며 서해안의 방비를 담당하던 진무영에 속한 군사시설로 감시와 지휘소 역할을 수행했다. 누각 자체는 병인양요(1866) 이후 허물어졌던 것을 2010년에 새롭게 복원한 것이지만 그 앞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염하 건너 김포 땅은 물론 날씨가 좋으면 북한의 개성 땅까지 바라보이니 이 순간만큼은 호사를 누리는 강화군민들이 부럽다.
강화읍내와 김포 문수산
강화산성은 고려 고종(1232년)때 토성으로 만들어 졌다가 몽골의 요구로 헐리게 된다. 이후 강화도의 잔략적 중요도가 부각되면서 조선숙종(1710년)때 현재와 같은 규모로 개축되였다.성의 길이는 7.1km,에 이르며 4대문과 수문, 암문 그리고 북장대와 남장대가 있다. 2008년 빌굴조사 기술자문위원회를 거쳐 2010년 남장대를 복원 하였다.
남문의 현판은 전 국무총리인 김종필의 글씨이고 바깥쪽에는 '강도 남문' 안쪽에는 '안파루'라 쓰여있다.
성문에는 수령 450년을 지닌 느티나무가 든든히 이 문을 지키면서 강화에서 펼쳐진 영욕의 현장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성벽은 견자산 자락으로 오르고 있고, 필자도 그 길을 따라 조용히 올라가 본다. 견자산 자락은 고려 무신 집권자 최우의 저택인 진양부가 있었다 전해지며 왕이 살던 궁궐보다 호화로웠다 전해진다.
강화산성 남문 안파루(晏波樓)강화읍 남산리 소재
강화읍 남산리에 있는 남문은 강화산성의 내성에 연결되었던 4대문 중 하나다. 조선 숙종 37년(1711)에 건립했는데, 2층 누각 앞쪽에는 강화남문, 뒤쪽에는 안파루(晏波樓)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겹처마 팔작지붕의 아담하고 시원스런 누각이다.
만발한 5월의 장미.
강화산성 동문 '망한루(望漢樓)강화중 옆(강화읍 관청리)에 소재.문루의 앞쪽 현판은 망한루(望漢樓, 한양을 바라보고 있다), 뒷쪽의 현판에는 강도동문(江都東門)이라고 되어 있다. 강화산성 동문은2004년에 4문(동.서.남.북문)중 마지막으로 복원된 것이다.
성공회는 1534년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해 나간 영국 국교회의 전통과 교리를 따르는 교회들을 이르는 말이다. 기존 로마 가톨릭의 전통과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구교와 신교의 장점을 포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동서교회(로마교회와 정교회)의 분열 이전 초대 교회의 신앙을 지향한다. 이런 정신은 종파와 종교를 뛰어넘는, 다양성과 개방성을 강조하는 전통을 가져왔다.인천 강화군 강화읍에 위치한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사적 제424호)은 1900년에 지어져 현재까지 미사를 드리고 있는, 현존하는 한국 최고(最古)의 한옥 양식 성당이다. 흔히 이곳이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아니다. 한국 최초의 성당은 서울 중구 중림동에 있는 약현성당이다. 명동성당보다 6년 빠른 1892년에 완공됐으며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 성당 건축물이다. 약현성당 이후 두번째 지어진 성당이자 최초의 한옥 성당은 1895년 전북 완주에 지어진 되재성당이다.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소실됐다가 2008년에 복원됬다.
성당내부.
성당의 지붕은 두개의 팔작지붕에 단청까지 칠해져 있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천주성전’이라 쓰인 현판이 눈에 띈다.
성당입구 문.
조선 25대 왕 철종(哲宗)이 강화도령이었던 시절에 살던 곳이다.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한다. 당시 아버지와 형이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14살 때 이 곳 강화로 유배되어 살던 곳이다. 150년 고택의 안채와 사랑채, 별채, 마루, 작은 정원, 우물, 반질반질한 문고리에서 강화도령 이원범으로 살던 그 모습이 느껴져 짠해진다. 14살부터 19살까지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며 땔감 구하러 산에도 가고 평민의 삶을 살았던 그 터전이다.
전시되여있는 직물기.
조양방직터
1910년대부터 강화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직물산업은 풍부한 노동력, 조직적인 판매 경로, 개량 직기의 도입으로 인한 공동작업장 운영으로 끝없는 발전을 이루게 된다.1917년 강화에서 직물조합이 조직되었고, 직물 품평회를 통해 우수한 품질을 심사하기도 하면서 강화의 소창은 그 품질이 전국에서 제일이었다. 강화도의 직물산업은 해방 이후에도 호황을 누렸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강화 전역에 소창 공장이 80여 군데에 이렀다고 한다.현재의 용흥궁 공원에 굴뚝만 보존된 심도직물과 담장만 남은 이화 견직 등 터조차 살피기 힘든 곳이 대부분이다.
개교126년된 강화초등학교.
고려궁지는 북산 기슭 가파른 계단을 올라 고려궁지에 들어설 때마다 답답함을 느끼곤 한다. 아무리 피난지에 세운 궁궐 터라고 하지만 고려궁지는 강화 유수부(留守府)나 이궁 터보다 협소하다. 39년간 고려의 황궁 자리가 아니었던가. 고려시대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규모가 컸으리라는 게 사학자들의 의견이다. 북산을 등지고 앞쪽과 왼쪽으로 상당히 넓은 공간이 궁궐 터였다는 얘기다.
강화궁지로 들어가는 승평문.
232년(고종 19) 6월 강화에 궁궐을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현재 강화 고려궁지라고 부르는 곳이 정궁(正宮)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그러나 1270년(원종 11)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 강화 고려궁은 정궁의 지위를 잃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 자리에 건물과 외규장각(外奎章閣) 등이 건립되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고려의 궁궐터.사적 제133호.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고종 19)부터 1270년(원종 11)까지 39년간 사용했다.고려의 궁궐터.현재 강화 고려궁지라는 이름으로 문화재 지정이 되어 있으나, 실제 고려 궁궐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고 조선시대 관아 건물 몇 채만이 잔존해 있으며 복원된 외규장각이 있을 뿐이다.
외규장각
복원된 외규장각 건물은 고려궁지(高麗宮址) 안에 있다.
강화도 외규장각에는 약 6,000책이 소장돼 있었는데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외규장각 건물과 함께 대부분 불태워졌다. 의궤를 포함한 중요 도서 약 300권은 프랑스군이 약탈해갔다. 2002년 외규장각 건물을 복원했고 우여곡절 끝에 2011년 5월 27일, 297책(의궤 294책)이 반환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외규장각 내부.
외규장각에서 바라본 남장대(남산).
남장대
6월1일 실시하는 제8회 지방선거 포스터.
서문도착.
강화산성 서문 '첨화루(瞻華樓) 강화읍 국화리 소재
서문의 누각은 첨화루(瞻華樓)이다. 숙종 37년(1711) 강화유수 민진원이 남문과 함께 건립하고 현판도 직접 썼다. 겹처마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 14평 규모의 누각이다. 누상에 오르면 강화 시내 전부를 조망할 수 있을 만큼 시야가 훤히 트였다. 적을 살피기에 그만이었을 것이다. 야산으로 이어지는 성벽이 복원되어 있고, 다소 수선스런 남문에 비해 잘 정돈된 주변이 퍽 한가롭다.민족의 아픈 사연은 서문이 더 짙다.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연무당터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연무당(鍊武堂)은 원래 강화진무영 군사들이 훈련하던 곳으로 열무당(閱武堂)이라 했다. 현재 농협 강화군 지부가 들어서 있는 자리에서 이곳 서문의 너른 터로 연무당을 옮겨 온 것은 고종 7년(1870). 그로부터 6년 후인 1876년 2월 국방 강화 의지가 한껏 고조되었을 이곳 군사 훈련장에서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우리나라는 인천·부산·원산의 항구를 열되, 일본인에게 치외법권을 적용한다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불평등조약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우리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36년의 압제를 받았으니, 서문의 연무당은 그 설움의 역사가 시작된 징표로 남아 있다. 사각형의 흰 대리석 앞면에는 '연무당 옛터'라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사연이 기록되어 있다.
요즘 보기드문 공중전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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