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여행

2016. 07. 04일 큐슈 시모노세키 관광

소담1 2016. 7. 10. 16:02

 

히라도섬 트레킹을 끝내고 호텔에 투숙해 하룻밤을 자고 아침일찍 일어나 호텔식 뷔페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고 출발하여

오늘은 시내 관광을하고 저녁에 배에 승선하여 부산으로 향해야 한다.

3시간을 달려 죠성후마을(사무라이마을)을 시작으로 아카마 신궁을,재래시장과 모지항등을 관광하고 일본 트레킹과 관광을

끝내고 승선하여 많은 볼거리와 다양한 음식을 맛보고 일본여행을 마무리한다. 

 

아카마 신궁 (기타큐슈와 시모노세키로 이동)

1185년에 건립된 아카마 신궁은 안토쿠 일왕을 신으로 모신 신사이다. 신궁의 빨간색은 슬픔을 상징하는 것으로 12세기 일본의 안토쿠 왕이 8살의

어린 나이에 바다에 빠져 죽었기 때문이다. 다이라 일문(헤이케)와 미나모토 집안간의 전쟁에서 다이라 일문이 패하자 외조모 기요모리가 어린 안토쿠에게

바다에 용궁이 있다고 속여 함께 빠져 죽었다고 한다. 이 전쟁을 원평전쟁이라고 하는데 이 때 승전한 미나모토 집안은 일본의 패권을 잡는다.

다이라 집안은 호겐 정변, 헤이지 정변등을 통해 왕실을 능가하는 정권의 실세가 되었으나 미나모토 집안에 패망한다.

1185년 안토쿠왕이 바다에 뛰어내려 자살한 그 해에 건립된 아카마 신궁(赤間神宮)은 안토쿠왕과 단노우라 해전에서 죽은 헤이케 사람들의 묘지가 있다.

바다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 안토쿠 왕의 시신은 며칠 후에 그물에 걸려 인양되었다고 한다. 아카마 신궁은 안토쿠 왕을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인데 조선의

통신사가 오갈 때 머무르는 숙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신사를 따로 신궁이라 부르는 곳은 황족을 모시거나 특별한 경우인데 신궁이나 신사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탄가재래시장 관광

1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큐슈 대표 재래시장으로 일본 일반인의 삶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각도시 각 지역마다 전통재래시장이 있으나 일본에는 재래시장이 거의없다.

하지만 야마구치 큐슈에는 100년된 고쿠라 탄가시장이 있다. 잘 정돈된 쇼핑센터를 보다가 재래시장으로 들어서니 우리나라 전통시장 처럼사람냄새와

살아가는 모습들이 정겨워보였다. 과일가게,생산가계,식육점,떡가게,반찬가계들로 가득한 재래시장은 여행객들의 발길을 잡는 명소이다.

 

모지항래트로

역사적 건물이 많이 남아 있는 낭만의 거리이며 과거 무역항으로 번영했던 곳이다.

모지항레트로는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에 있는 오래전부터 국제무역항으로 번영했던 항구이다.

모지항주변의 거리가 복고풍으로 잘 정비되있고 레트로 지구에는 옛모습을 느낄수있는 다양한 볼거리와 함께 먹거리로 즐비한 거리이다.

근대건물과 현대건물이 상존하며 잘 조화를 이루고있고 모지항주변에는 모지코레트로 타워전망대가 있는데 높은 현대식 건물과 모지항 호텔 그리고

유럽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오사카상선건물,모지세관,모지미쓰이 클럽,국제우호기념 도서관(현재 중국식당으로 사용)등이 산재되 있고 우리나라 부산 영도대교

처럼 하루에 여섯번 열렸다 닫혔다 하는 "블루윙모지"교가 있다. 일본유일의 보행자 전용다리로 연인들을 이어주는 다리라 부르는 도개교가 있다.

그리고 모지항을 통해 처음으로 일본에 바나나가 들어왔다고하여 바나나맨 모형포즈 조형물도 있다.

 

 죠후성하마을(사무라이마을)

아키타현 센보쿠시 기쿠노다데마치에가면 17세기 에더(江戶)시대에 형성된 도호쿠(東北)지방의 작은 교토라고 불릴만큼 잘 정돈된곳이 있는대 200년 이상된

무사들의 자택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있다. 수십여채의 무사저택들이 모여있다. 일본정부에서는 이마을 전체를 전통건조물 보존지구로 지정하고 있으며

저상후 마을에는 오래된 전통가옥과 신사,사원이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안동 하회마을과 같은 일본의 민속마을이다.

그중 죠후모리 저택은 일본사무라이 저택을 잘보여준다. 다다미로된 수십개의 방과 아름다운 정원들을 볼수있다.

깨끗히 잘 정돈된 길을따라 하천이 흐르는데 맑은물이 내려오는 하천에는 오리가족과 팔뚝만한 비단잉어들이 헤험치고있다.

하천길을 따라 끝까지 오르면 코잔지라는일본에서 가장오래된 산사양식의 일본국보인"공산사" 건물이 나온다. 우리나라 절에는 화려한 단청이 칠해져 있는대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목재와 지붕은 음침하기까지 하다.

 

 선 통신사 상륙기념비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도착하는 장소중 가장 처음인곳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비로 시모노세키에 있는 옛조선의 문화교류 사절단격인  조선통신 사절단이

생륙했던 곳이다.그리하여 이곳에는 400년전 1607년 일본에 많은 문물을 전한 조선통신사들의 상륙울 기념하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 비에는 안일의원연맹 회장이였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직접쓴 글씨가 새겨진 상륙비가 있고 돗이 하나 바닷가에 있는대 그곳이 최초 상륙했던 지점이라한다.

 

 

 

아침 란투호텔 뷔페식사의 모습.

 

 

묵었던 란푸호텔 다다미방

 

 

고속도로 휴게소의 깨끗한 모습.

 

 

무한 소고기 뷔페의 모습.

 

 

소고기부페에서 식사 참 정갈하고 맛있었다.

 

 

죠우성하마을(사무라이마을)의 풍경.

 

 

 

 

 

공산사입구에서.

 

 

 

 

 

 

 

 

일본의 국보인 사찰앞에서.

1953년 일본 국보로 지정된 코산지 불전이다. 1320년에 건립된 선종(禪宗) 양식의 건축물로는 가장 오래된 사찰로 밝혀져 1953년에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곳에도 우리의 아픈 사연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약탈당한 고려불화 양류관음(楊柳觀音)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사찰뒤로는 거대한 묘지가 자리잡고있다.

 

 

 

 

 

 

 

 

 

 

 

 

 

 

 

 

 

 

명품소나무 분재와같이 대문지붕을따라 길게 자라고있는 소나무.

가격을 메길수없단다.

 

 

하천에는 비단잉어와 오리들이 헤엄치고있을 전도로 깨끗하다.

 

 

 

 

국화문양이 있는 아카마신궁의 모습.

 

 

 

 

 

 

 

 

 

 

화려한 색깔이 인상적이다.

 

 

 

 

 

 

 

 

 

 

 

 

신궁까지는 접근을 할수없다 통제되 사진으로만 남긴다.

 

 

이곳에서만 잡히는 인상쓰는 게가 공예품 파는 상점앞에 전시되있다.

신사내 공간에 게를 박재해서 전시하고 있는데 『헤이케(平家)의 게』라고 한다. 자세히 보면 게의 등딱지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두 눈과 코,

수염에 입까지 갖출 건 다 갖추었는데 사람을 상징하는 사지까지 정말 그럴 듯하다. 단노우라 해전에서 패배해서 바다에 몸을 던진 헤이케 사람들이

이렇게 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다는데, 이렇게 게 박제를 통해서 증명(?)해 보이려는 것 같다.

 

귀없는 맹인부처.(방일당)

본당 우측으로 가다보면 귀 없는 스님 호이치 당이 나온다. 옛날에 아주 가난하기 짝이 없는 맹인 스님 호이치(芳一)가 있었는데 그에게도 한 가지 장기가 있었으니 비파를 잘 연주하고 노래를 잘 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비파를 연주하고 노래를 들려주고는 끼니를 얻어먹고 살았다고 한다. 그는 특히 겐지와 헤이케 두 세력의 패권 싸움과 헤이케의 몰락, 안토쿠 왕이 바다에 투신하여 생을 마감하는 애잔한 이야기를 담은 ”헤이케모노

가타리(平家物語)“를 아주 잘 불렀다고 한다. 이곳 아카마 신궁의 주지 스님이 그의 노래를 좋아해서 이곳에서 생활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종종 그의

”헤이케모노 가타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한 사무라이가 나타나서 아주 귀한 분이 호이치 스님의 노래를 듣고자 하니 같이 가자며

호이치를 데리고 나간다. 앞을 못 보는 호이치는 그냥 그 무사만 따라 갔는데 정말로 궁전 같이 느껴지는 곳의 여러 사람 앞에서 ”헤이케모노 가타리“

를 불렀다고 한다. 이렇게 며칠 동안 밤마다 밖으로 나가는 호이치를 이상하게 생각한 주지 스님이 다른 스님에게 호이치의 뒤를 따라가 보도록 한다.

스님이 호이치의 뒤를 따라가 보니 헤이케의 무덤 앞에서 ”헤이케모노 가타리“를 부르고 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주지 스님은 필경에는 헤이케의

원혼들이 호이치의 목숨을 거두어 갈 것으로 판단하여 비책을 쓴다. 호이치의 온몸을 경전으로 감싸서 원혼들이 보지도 듣지도 못하도록 했는데 실수로

양쪽 귀는 감싸지 않았다고 한다. 어김없이 호이치를 데리러 왔던 사무라이 영혼은 호이치는 보이지 않고 두 귀만 있자 왔다 갔다는 증거로 이거라도

가져가야겠다며 두 귀를 베어 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호이치는 두 귀는 잃었지만 목숨은 보전했으며, 이 일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유명한 일본판 “전설의 고향”이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이곳에 호이치 당을 짓고 그를 모시고 있다. 호이치당에 안치된 비파를 연주하는 호이치 스님 목상은 마치 지금도 비파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듯 생동감이 있으며 강한 인상을 준다.

 

 

 

 

 

 

 

 

 

 

 

 

산사나 신궁의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를 나타내는 의식적인 관문 도라이.

 

 

신궁입구의 모습.

신사는 심을 모시는 곳이고 국화무늬가 새겨진 신궁은 왕을 모신곳이라고 한다.

 

 

 

 

조선통신사 기념비앞에서.

 

 

이곳이 처음으로 조선통신사 배가 들어온곳이라고 한다.

 

 

 

 

 

 

공원 한편에 안토쿠 왕이 외조모의 품에 안겨 바다로 뛰어 들어 생을 마감하는 조각상이 있었다. 서기 1180년에 81번째 천황으로 3살의 안토쿠 왕이

즉위했는데 실권은 외조부인 다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가 잡고 있었다고 한다. 실권을 잡은 헤이케(平家) 일족은 억압적인 세도 정치로 민심을 잃고

있었는데 겐지(源氏) 일파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리게 된다. 쫓기던 헤이케 일파는 서쪽으로 도망가다 마침내 해상으로 밀려나고, 1185년에 마지막으로

단노우라(壇ノ浦) 해전에서 패배하며 전멸하였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안토쿠(安德) 왕은 단노우라 해전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외조모의 품에 안겨 바다로 뛰어들어 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바다로 뛰어 들 때 안토쿠 왕이 외조모에게 “저를 어디로 데려 가시는 겁니까?“

라고 묻자 외조모는 ”이 나라는 괴로운 곳이므로 바다 밑의 용궁으로 가시는 겁니다.“라고 외손자를 달래며 바다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탄가재래시장의 입구.

 

 

시장의 모습.

 

 

 

 

모지항 레트로에 도착해서.

 

 

 

 

관광객을 위한 인력거.

 

 

국제우호기념 도서관건물앞.

 

 

 

 

모지항으로 처음 바나나가 들어왔다고 하여 조형물이 세워져있다.

 

 

근대와 현대가 조화를 이룬다. 타워전망대가 있는 건물.

 

 

 

 

 

 

 

 

하루에 6번 열렸다 닫히는 도개교인 불루읭모지교

 

 

 

 

 

 

시모노세키항 훼리 터미널.